[문화투데이 장은영 기자]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1597년 4월 19일 일기)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정유년, 즉 1597년에 쓴 일기는 여느 때보다 격정적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두고 조정과 의견이 달랐던 그는 왕명을 거역한 죄로 파직됐고, 그해 3월 투옥됐다.
감옥 문을 나선 건 4월이 되어서였다.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가족과 지인, 부하들을 만나느라 바빴고, 어머니와 만날 생각에 들떠있었다. 1596년 10월 이후 반년만의 상봉이었다.
그러나 모자의 극적인 만남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여수에서 아산으로 가던 중 안흥량(安興梁)에 잠시 정박했던 어머니 초계 변씨(1515∼1597)는 아들을 보지 못한 채 배 위에서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4월 13일 어머니를 마중하러 갔다가 부고 소식을 접한 이순신 장군은 "달려 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고 심정을 털어놓았다.
'위대한 영웅', '불굴의 명장'을 키운 어머니의 마지막을 기리는 안내판이 들어섰다.
28일 문화계에 따르면 충남 태안군은 지난해 10월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일대에 '충무공 이순신 어머니 초계 변씨의 안흥량 해상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했다.
안흥항과 가까운 이곳에 이순신 유적 안내판을 세운 건 처음이다.
오랜 기간 충무공을 연구하며 2013년 '난중일기'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때 자문위원을 지낸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이 고증을 맡았다.
노 위원장은 충무공 탄신일(4월 28일)인 이날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초계 변씨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적 지주"라고 강조했다.
전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마음에 새겼다는 '대설국욕'(大雪國辱)이 대표적이다.
1594년 설날 군사 훈련과 작전을 마치고 잠시 돌아온 아들에게 초계 변씨는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당부한 것으로 전한다.
이순신 장군은 평소 어머니를 칭할 때도 한자 '어미 모'(母) 자 대신 '천지'(天只) 즉, 하늘 같은 존재로 여겼다고 한다.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4년 1월 일기에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서도 다행 한 일'이라고 적었고, 이듬해에는 늦은 밤 홀로 생각에 잠겼다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이라고 털어놓기도 한다.
초계 변씨의 부고 소식을 듣기 이틀 전인 1597년 4월 11일 일기에서는 걱정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당시 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새벽녘 꿈에서 깨어나 몹시 심란해했다.
"마음이 몹시 침울하여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노 위원장은 두 사람의 사연을 정리해 안내판 설명에 담았다.
안내판은 충무공의 생애에서 중요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인 '십경도'(十景圖) 중 '충무공의 효성'을 그린 그림과 함께 초계 변씨의 마지막 순간을 전한다.
또, 안흥량과 관련해서는 "안흥 지역의 해로로 임진왜란 때는 여수에서 고금도, 명량, 고군산도, 안면도에서 아산을 잇는 해상 뱃길"이었다고 설명한다.
노 위원장은 "초계 변씨의 자애로운 정과 이순신 장군의 남다른 효심이 서린 안흥량이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며 국내 충무공 관련 유적에 대한 관심을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