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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특별기고] '동락전투' 재정립이 필요하다

이규홍 충주신문 대표이사

충주 신니면 동락리에서 일어났던 동락전투는 6·25 한국전쟁 발발 후 최초의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전투로서 이 나라를 구한 전투라는데 의미가 깊다.


한국전쟁 발발 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이 7월 7일 충주시 신니면 동락리에서 처음으로 승리하였고,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계속 밀리고 사기가 떨어진 국군에게는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는데 시간을 벌어주었으며, 노획한 소련제 무기들은 유엔으로 보내져 유엔군 결성의 당위성을 심어주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을 하게 됨으로써 풍전등화의 한국전을 반전시키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위기의 한국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압록강까지 진군하게 된 원인은 바로 동락전투의 승리가 그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이는 우리나라를 구한 전투가 바로 동락전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전과도 훌륭했다. 1개 대대 병력으로 적 15사단 48연대의 연대 병력을 초토화 시켰고 소련제 무기, 장갑차, 트럭, 소총, 각종 포 등 많은 노획물을 획득했으므로 이는 소련이 한국전에 개입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된 것이다.


이렇게 큰 전과 외에도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한 결정적 계기가 된 동락전투가 요즘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작은 동산 속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후 동락전투의 주역이었던 6사단 7연대 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60년대 들어 당시의 상황을 소설화 한 ‘전쟁과 여교사’라는 책으로 펴내 절찬리에 판매되고 이는 임권택 영화감독에게 채택되어 전쟁과 여교사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당시 최고의 배우라 할 수 있는 김진규, 엄앵란, 박암, 이경희 씨 등이 출연하여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그때까지는 동락전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충주시에서 이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아 6·25 한국전쟁의 최고의 전투라는 영예로운 이름은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더욱이 90년대 초 당시 여교사로 6사단 7연대 2대대에 적의 상황을 낱낱이 제공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동락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재옥 여교사가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어 설왕설래하였으나 참전했던 신용관 박격포 중대장 등의 증언 등으로 누명을 벗을 수 있었던 사건도 일어났다. 이러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재옥 여교사가 전쟁 발발 후 60여년이 지난 다음 국민훈장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그동안 충주의 무관심을 탓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동락전투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져야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6사단은 충주에서 창설된 사단으로 충주에서 한국전쟁 최초의 승리를 이끌어냈다는 점이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충주 역사에서 흐르는 정신력이다.


충주에서 창설된 6사단은 충주 병력이 주를 이루었고 춘천 방어에 나섰던 6사단이 그때까지 한 번도 지지 않았던 점 그리고 충주는 역사적으로 김취려 장군의 박달현 전투, 김윤후 장군의 충주산성 전투, 신립의 탄금대 전투 등 강인한 정신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었던 고장이다. 그 정신을 다시 되살린 것이 동락전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동락전투라는 것은 국방부 자료에도 없다. 다만 당시 6사단 7연대 사령부가 음성에 있었다 하여 음성전투로 되어있을 뿐이다. 이것부터 바로 잡고 동락전투의 위대한 전과를 되살려야 한다.


또한 충주의 정신력을 되살리기 위해 역사적 큰 전투 등의 사실을 밝혀내어 충주에 전 국민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호국 공원을 만들 필요성이 있다. 대몽항쟁에서도 충주산성 전투가 가장 강력한 군대를 퇴치한 사건이고 금의 침입으로 패배만 거듭하던 고려를 구한 것이 박달현 전투이다. 신립의 탄금대 전투는 비록 패했지만 8천 군사가 장렬히 배수진으로 전사했던 곳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호국 공원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