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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특별기고] 나라를 구한 ‘동락전투’

이규홍 충주신문 대표이사

◇ 동락전투의 의미

 

동락전투는 6.25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이 계속 밀리면서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의 사기가 최저로 저하된 상태에서 국민들에게는 희망을 안겨주고 국군에게는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전투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춘천에서 빈틈없는 지역방어로 춘천지역을 사수하던 6사단은 서울이 함락되고 서부전선이 계속 밀리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자칫 고립될 것을 염려하여 홍천~원주를 거쳐 충주로 체계적인 남하를 하였다. 
  

충주에 도착한 6사단은 적 15사단 48연대와 49연대가 장호원 방면으로 남하한다는 정보를 받고 7월 4일 6사단(사단장 김종오)은 2연대를 충주방어로 남겨놓고 7연대를 음성 방어 임무를 맡겼다. 7연대장은 2대대를 선발대로 출발시켰으나 7연대장 임부택은 2대대장(김종수 소령)으로부터 적이 이미 무극리와 생극리로 진출한 것으로 판단하고 연대를 음성방어 임무를 띠고 출발하려할 무렵 1개 대대를 진천쪽에 투입하여 이천에서 철수하고 있는 19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2대대를 진천으로 전환하여 1대대를 무극리에 배치하고 3대대(대대장 이남호)로 하여금 생극에 있는 적15사단 48연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또한 19연대를 지원하러 간 2대대의 상황 변화로 인하여 음성본부로 귀환하자 2대대를 동락리 앞 부용산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연대장의 명령을 받은 3대대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생극으로 향했으나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 자칫 무모한 공격이 될 것을 간파하고 음성 연대본부 방향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동락리 주민들이나 동락초등학교를 지키고 있던 김재옥 여교사도 국군이 퇴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적 48연대가 들어오자 국군은 다 도망갔다고 진술하게 되는 것이다. 
  

음성본부로 돌아온 3대대장은 임부택 연대장에게 크게 질책을 받고 가엽산 남쪽 290고지(용원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즈음 적48연대는 동락리로 진출하고 주민들에게 국군의 행방을 묻자 주민들이 한결 같이 국군이 다 도망갔다고 진술하였고 동락초등학교에 주둔한 본부에서도 김재옥 여교사로부터 국군이 다 도망갔다는 진술로 안심하였으나 더욱 세밀한 관찰을 하기 위해 첨병을 용원 남쪽에서 주덕면 신양리까지 살피게 하였으나 국군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어 안심하고 휴식에 들어간 것이다. 
  

이 무렵 용원초등학교를 지키던 19세 소녀 김재옥 여교사는 집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속이고 4㎞ 정도 되는 거리를 질주하여 부용산 사수명령을 받고 이동중인 2대대(대대장 김종수)를 찾아가 적의 동태를 상세히 알리게 된다. 
  

김재옥 여교사의 제보를 받은 2대대장은 신용관 8중대장(박격포 중대장) 등 부대 중대장들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준비하고 있던 중 적 48연대의 선두가 진출해 있던 용원리에서 교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극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온 3대대 병력이 적 48연대의 선두를 공격한 것이다. 


이에 적들은 몇 명 안 되는 국군과 교전하는 것으로 알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으나 이어 2대대의 박격포가 작렬을 하고 대대 병력의 기습적 공격이 이어지자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바빴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적에 대해 군 연대의 전투 상보에 의하면 이때 전과를 사살 2,000여명(추정)포로 100여명과 함께 장갑차 4대 트럭 60대 등 1개 연대분에 해당하는 장비를 노획했다고 기록했고 군 정훈자료에 의하면 사살 2,186명, 포로 186명의 전과를 올렸다고 했다. 
  

또한 국방부 자료 한국전쟁 제3장, 지연작전편 음성 괴산부근 전투에서는 사살에 대해서는 기록되지 않고 군수참모를 포함 포로 132명, 각종 포 54문, 차량 75대 등 많은 장비를 노획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동락전투 전승지 안내문에는 적 사살 1,100명, 포로 97명, 122mm 척사포 6문, 76mm 곡사포 6문, 기관총 41정, 권총 및 소총 2,000여정 장갑차 10대, 모터사이클 20대, 지프 20대 2.5톤 차량 40대로 기록되어 있어 좀 더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고 여러 경로를 통한 연구와 심층 분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 동락전투의 의의와 정신

  
동락전투는 6.25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 국군의 지연작전에 의해 진천, 청주, 음성, 괴산 등 중서부지역과 충주, 제천, 단양 등 중동부 지역에 국군1군단을 청주지역에 배치하고 수도사단을 진천에 배치하였으며 1사단은 음성, 6사단은 충주, 8사단은 제천과 단양에 배치하여 국군과 미군이 체계적으로 남하할 수 있도록 지연작전과 국군과 미군이 전략을 세워 반격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6사단(사단 김종오 대령)은 2연대는 충주방어 7연대는 음성방어 임무를 띠고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6사단 7연대의 1대대는 무극리 소여리 일대의 전투에서 49연대 예하부대와 교전 끝에 적을 섬멸하였고(일명 감우재 전투의 시작) 2대대와 3대대는 동락리에서 적 48연대를 괴멸시키는 전과를 거두어 북한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미군의 증원과 국군의 재편성 및 지휘체계를 정비할 시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지연작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국군의 참담한 패배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고 국군에게는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더욱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 19세 소녀 여교사인 김재옥 선생의 기지와 용기는 국민 누구나 전투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모두가 단합하면 승리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충주 동락전투의 승리로 인해 노획된 소련제 무기들은 이해 8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이 6.25한국전쟁에 지원하였다는 증거물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당시 소련은 북한의 남침이 아닌 남한의 북침을 주장했고 소련은 한국전쟁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6월 27일 결성된 유엔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그만두고 유엔군을 해체하라고 압박했다. 
  

그러다 8월 소련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의장국이 되자 소련의장인 말리크는 유엔군을 해체하라는 압박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이에 한국의 미국대사였던 장면은 미국대표인 오스틴과 짜고 소련제 소총을 증거로 채택하여 소련이 더 이상 유엔군 해체를 주장하지 못하게 했고 이로서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함으로써 한국전쟁을 반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동락전투의 승리가 우리나라를 구한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이 전투에서 3대대가 생극 공격을 포기하고 임의로 철수한 것은 결과적으로 적을 유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서 3대대의 선제공격과 2대대의 김재옥 여교사가 제보한 정보에 의한 전략적 공격은 교묘한 협조 작전으로 승리를 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동락전투 승리의 주역인 7연대 전 장병들에게는 이승만 대통령이 전원 1계급 특진의 영광이 주어졌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3대대의 후퇴를 목격한 주민들이 국군은 다 도망갔다는 제보를 한 것을 두고 다시 동락리에 진격한 북한군에 의해 동락주민들이 몰살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 동락전투 현장의 성역화 작업과 충주의 정신


충주 동락전투의 승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최초의 전승지로 남침의 근거를 확보하여 유엔군의 참전 당위성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를 구한 의미 있는 전투로 각인 되고 있다. 
  

또한 동락전투의 현장을 성역화하여 앞으로 안보의식이 많이 약화되고 있는 미래 세대들에게 호국보훈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 직접 체험하고 교육할 수 있는 교육장으로 활용돼야 한다. 
  

더욱이 동락전투는 유엔군 참전의 당위성을 이끌어내 우리나라를 구한 의미 있는 전투로서 유엔과의 밀접한 관련성과 이러한 고장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을 것이다. 
  

그것은 곧 유엔평화공원조성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그러나 2016년 조성된 동락 전승지 성역화 사업은 20억 원을 들여 조성한 것으로 동락전투의 역사적 의의에 비해 많이 뒤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동락전투와 음성 감우재전투 첫 승리에 기여한 6사단은 1948년 6월 충주에서 창설된 사단으로 당시 춘천방어를 패배 없이 방어했고 충주 동락전투와 감우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 압록강에 최초로 진군해 압록강물을 떠오는 초산부대가 바로 6사단이라는 점 그리고 충주에서 창설됨으로서 충주사람들이 가장 많이 참여했고 지리에 밝았다는 점도 부각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동락전투에서 귀중한 정보 제공으로 승리의 견인차역할을 했던 김재옥 여교사가 60여년 만에 국가 훈장이 수여된 점에 대해서는 참으로 충주시의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충주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며 충주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충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